'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단언할 수 없어도 일은 시작해야겠다고 선언할 필요가 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좋은 기억이 된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할 일이 보인다. 그것이 기쁨일 때 사물에서 빛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가 일에 관해 써 내려간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헝클어진 책상과 서랍이 정리되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듯했다. 재능의 배신으로 멘탈이 널을 뛰는 시대에, 도리어 재능이 없어 재미를 붙이고 일의 원리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미나가와의 모습은 경이롭다.
선생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저는 유치원 마당에서 혼자 찰흙 구슬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구슬을 굴릴 때 느껴지는 감촉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만들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아졌어요. 구슬은 반복해서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까맣게 윤이 났죠. 요령을 깨닫고 돌아보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조용한 시간이 좋았어요. 잡념 없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했어요. 다행히 그 시절의 어른들은 다 너그러웠습니다.
찰흙 구슬 만들기 말고 또 뭘 좋아했나요?
달리기를 좋아했어요. 팔과 다리, 보폭 등 자세를 고쳐가면서 궁리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달리는 것 자체도 즐거웠지만 기록에 따라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자극이 됐어요. 잠들기전에는 항상 눈을 감고 달리기 시합을 시뮬레이션했습니다. 어떻게 좋은 위치를 선점할지, 어느 타이밍에 스퍼트를 낼지... 기록이 월등하진 않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몰두했어요. 한계를 극복하고 조금씩 성장하는 그 느낌이 좋았어요.
육상의 감각은 이후 그가 하는 모든 일의 기본이 되었다. 그에게 미적 분위기를 심어준 어른은 조부모였다. "이건 버팔로 가죽이란다" "오동나무로 만든 장롱은 낡아도 다시 깎아내면 새것이 돼."
외할머니의 밝은 목소리를 타고 오래된 것들의 가치가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그 일이 좋아서 하는 어른들에게선 자부심 넘치는 단호함이 풍겼다.
패션에는 언제 매력을 느꼈습니까?
정확하고 거침없이 잘려나가는 천의 밝은 단면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죠.
재능을 발견했나요?
아니요. 저는 재단 일을 잘 못 했어요. 그래서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서툰 일을 반복하면서 실력이 느는 것에 흥미를 느꼈지요. 패션은 저라는 사람과 너무 동떨어진 일이었고, 그래서 이 일을 하는 미래의 제 모습에 호기심이 일었어요.
재능이 아니라 적성을 찾아가는 끈기 있는 과정. 잘하는 일이 아니라 잘 맞는 일을 몸에 익히며 조금씩 그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방식. 일종의 수련이었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그랬다.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잘해서가 아니라 잘하고 싶어서 계속하게 된다. 정체되거나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도 하다 보면 완성이 되어 있고, 운 좋게도 조금씩 실력이 늘기도 한다.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라는 제목으로 나온 미나가와 아키라의 책에는 '어떻게 적성을 찾고 계속해서 브랜드가 되고, 어떤 사람과 일할 것인가'에 대한 어른의 서사가 뺴곡하다. 문장에서 실용적이고 단단한 공력이 느껴니다. 유독 많이 발견한 단어는 '흥미'와 '기쁨'이었다. 남의 힘을 빌리기 위해선 상대가 기뻐할 만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거나 흥미를 느끼면 단박에 쉽게 그 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한 분야에 정성을 다하는 일본의 장인 문화와 미나가와 아키라 특유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는 배짱이 어울러져 매우 닮고 싶은 직업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어시장에서 참치를 해체할 때나 봉제 공장에서 천을 자를 때, 모피 가게에서 손님의 몸에 줄자를 대로 치수를 잴 때조차 그의 동작에는 본질을 가르는 동일한 기쁨이 깃들어 있다.
조급하지 않게, 낭비 없게, 기본을 알고 재료에 집중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퀄리티를 보증하는 것은 경험의 축적이라고 단언한다.
다들 뜰뜨던 80년대 호황기 시절에, 낮에는 봉제 공장에 밤에는 전문학교를 다녔다고요. 휩쓸리지 않는 기질이었던가 봅니다.
당시 문화복장학원의 야간 학비는 비싸지 않아서 봉제 공장에서 받는 급여로 충분히 다닐 수 있었어요. 제 자유의사로 선택한 학교였고 그래서 스스로 학비를 내는 게 기뻤어요. 게다가 저는 패션 일에 유능한 편이 아니었어요. 수업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한 낮 시간대 수업은 따라가지 못했을 겁니다.
매사 어떤 느긋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군요
학창 시절 육상부 선생님에게 '사람의 성장은 일정하지 않고 개개의 성장을 긴 안목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때의 경험 덕에 일도 사람도 장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됏어요. 달린다는 것은 타인과의 승부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자 스스로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어요. 뛰면서 정신이 신체를 만들고 신체가 정신을 지탱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됐죠.
어시장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것과 봉제 공장에서 천을 재단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같았다고요. 그걸 몸의 감각만으로 깨우쳤다는 거지요?
네. 참치를 정형하는 것과 천을 재단하는 일은 정말 비슷합니다. 칼과 가위를 써서 정확하게 재료를 손질하는 일이니까요. 재료에 닿기만 해도 잘려나갈 정도로 도구를 갈아놓아야 했어요. 몸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피부로 감각을 느끼면 머리로 응용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어요. 손과 팔에 힘을 주는 방법, 잘라 낼 포인드... 몸의 움직임 속에서 일하는 타이밍이나 속도가 조화를 이룰 때 합리성이 생기고 아름다움이 태어납니다.
전혀 모르는 일에 맞딱뜨릴 때는 어떻게 돌파합니까?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우리의 위치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었죠. 그저 부딪혀 보는 행동이 상상 이상으로 공부가 됩니다. 몇 벌이라도 옷을 사준 고객들에게 평생 감사하게 되지요.
여행할 떄마다 점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군요. 신문물도 접하고, 배짱도 생기고, 호의도 경험하면서... 일본에 계속 머물렀다면 달랐겠지요?
답이 안 보일 때 여행이 출구와 기회를 찾아줬어요. 몰랐던 걸 알게 되고, 알고 있던 것도 다른 관점에서 보며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죠. 불안 속에서 태어나는 기쁨이 얼마나 좋은지도 느꼈고, 계획은 변해야 정상이라는 것도 깨달았아요. 하지만 여행을 가지 않고 비슷한 가치관에 둘러싸여 살았어도 저는 지금과는 또 다른 보람 있는 일을 만났을 겁니다.
'우연을 자본화'하는 세렌디피티도 요즘 세상에선 큰 능력입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데이비드라는 청년에게 선뜻 '해외 구매 담당'으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는 장면은 놀라웠어요. 어떻게 아무런 의심 없이 우연에 몸을 맡길 수 있나요?
(단호하게) 신뢰는 시간으로만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순간의 느낌으로 오죠. 특이점이 보이면 저는 의심하기 이전에 믿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제안을 해요. "우연한 만남이지만 너는 훌륭한 파트너야. 앞으로 반년간 너를 믿을게"
생각해 보면 제가 파리의 준코 코시노 컬렉션에 일손을 보태게 된 것도, 모피 전문점에서 일하게 된 것도 누군가의 우연한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어요. 이젠 내가 손을 내밀 차례죠. 그 일을 지탱해 주는 건 전문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신뢰 관계였어요.
자연계가 그렇듯이 회사나 조직도 다양성을 끌어안아야 오래간다고 했다.
일은 어떤 사람과 하는 것이 좋습니까?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고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전문 기술은 개인의 특성에 맞춰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제 첫 어시턴트였던 나가에는 '그건 내가 못 하는 일이야'라는 생각 자체를 안 했어요. 봉제를 못해서 오히려 계속했던 제 사고회로와 비슷했달까요. 나아가 입바른 소리 대신 "뭐지? 이 사람은?"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에너지가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미나를 이끌고 있는 다나카가 그랬어요. 돈보다는 성장을 원했죠. 그런 사람들은 쉽사리 그만두지 않아요. 브랜드나 회사를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요.
남기지 않으려는 성향은 어시장 아르바이트 경험에서 비롯했다고 했다. 재료의 특성을 어떻게 살리느냐는 봉제나 생선 손질이나 마찬가지라고. 심지어 힘든 시절 아르바이트 경험도 서덜탕에 쓰이는 서덜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어릴 적 찰흙 구슬 만들기부터 여행지에서의 아르바이트, 복구에서 보낸 겨울, 초창기 영업 대참사의 경험까지 낭비 없이 배움으로 가져다 쓰는 실사구시의 반듯한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여러 일을 거치면서 깨달은 '일머리'의 진리가 있을까요?
경험은 버릴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제대로 일하면 다음에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돼요. 나 또한 참치 손질을 열심히 했고 모피 가봉도 한 땀 한 땀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손재주가 없었기 때문에 정성을 들였죠. 언젠가는 잘하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요즘 일상은 어떻게 흘러가나요?
아침에 눈을 뜨면 '아,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구나'라고 느껴요. 보람 있게 하나하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맛있는 요리를 직접 해 먹습니다. 이런 행복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일과 생활을 애써 분리하지 않는군요.
어시장의 스승님께 일은 삶의 소중한 일부라고 배웠어요. 지난 생을 되돌아보는 잣대가 되기도 해요. 저는 일을 하면서 생기는 어려운 점들은 인생이 출제한 퀴즈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 달릴 수 있는지는 일하는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지요.
저성장 시대에 ai와 경쟁까지 치열해지는 요즘, 어떻게 일의 기쁨을 회복할까요?
일하는 것은 원래 다 창조하는 것입니다. 직접 만든 옷을 자동차에 싣고 한 번도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때조차 창조입니다. 청소기를 돌릴 때나 유리창을 닦을 때도,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를 할 때도 마찬가지죠.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자발적으로 하는 모든 일에 우리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요. 상상력은 단순노동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힌트를 발견하는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생에게 옷이란 무엇인가요?
옷은 몸이 바깥 세계에 닿는 최초의 기쁨이죠.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시작하건, 분야에 상관없이 '어떤 좋은 기억을 만들고 싶은지' 생각하라고 해요. 그러면 매일 작은 깨달음들이 올라올 거라고요.
2022.04.16
미나가와 아키라는 스포츠를 좋아해서 달리기 동작에서 모든 창조적인 일의 기본을 익혔다. 하루 종일 앉아서 찰흙 구슬에 윤을 내듯, 텅 빈 체육관에서 홀로 운동 자세를 교정하듯. 그는 사물의 정확하고 밝은 면을 보며 조금씩 수련해 갔다. 일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며 성장의 기쁨을 누리는 그의 수련 과정에 나는 탄복했다. 일을 시작하며 겪은 문전박대도 경험으로 저축하는 겸손과 느긋하고 낭비 없는 근성, 계획은 변해야 정상이며 사람은 믿어야 시너지가 난다는 배포까지. 그 모든 원리는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내 작업 과정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직접 만든 옷을 자동차에 싣고 한 번도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때조차 창조라고 이야기는 미나가와 아키라는 디자이너라기보다 철학자에 가까웠다.
그가 '옷은 몸이 바깥 세계에 닿는 최초의 기쁨'이라고 표현할 때, 일을 시작할 때마다 '어떤 좋은 기억을 만들고 싶을지 생각한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인터뷰와 글쓰기로 바꿔서 되뇌어 본다. '인터뷰는 한 인간이 바깥 세계에 닿는 최초의 기쁨'이며, 글쓰기를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좋은 기억을 세상에 만들어 낼지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인터뷰로 접하지 않고, '위대한 대화'라는 책을 통해 접했다.
그 책의 모든 인터뷰는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서 줄을 긋고 또 접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 인터뷰는 그 책의 마지막에 있었다.
왜 마지막이었는가는, 읽는 내내 시선을 한번도 뗄 수없고 이제는 그 단어를 하나하나 파헤쳐 꼭꼭 씹어먹고 싶었던 그런 나의 마음이 가히 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글에 대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일을 하고 고민했던, 재능에 좌절하고 슬퍼했던 그렇지만 계속했던, 그렇게 또 무너지면서도 계속하다보면 어느새 끝나고 있었던 되돌아보면 성장해 있었던 나에게
그가 들려주는 위로와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원리는 결국 같으니까.
잘하지 못해서 오히려 좋았다는 그의 인터뷰가 너무 좋다.
젊은 시절 받았던 도움과 좌절을 다시 기회로 내어주는 따뜻한 그가 좋고,
타인을 믿는 것은 결국 나를 믿는 것이라는 더 큰 깨달음을 주는 그가 좋다.
역시나 김지수님의 글은 말해 무얼하나.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인간은 정말 아름다운 존재인 것 같다.
나도 그마음 새기며,
감사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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